티스토리 뷰

목차



     

     

    근로장려금을 신청했는데 내가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빠르게 확인 가능한 방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1. 근로장려금 신청현황 확인방법

     

    아래의 경로를 통해서 PC에서 홈택스 혹은 모바일에서 손택스 어플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국세청 홈택스(로그인)] →  [장려금·연말정산·전자기부금] → [근로·자녀장려금] → [반기 근로장려금] → [심사 진행 조회]

     

    하지만 바쁘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드리겠습니다.

     

     

    2. 근로장려금 신청현황 바로 확인하기

     

    아래 그림처럼 근로장려금 정기신청 및 근로장려금 반기신청 진행현황을 한번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  함께보면 좋은 글  ⬇️

     

     

     

    ⬇️  근로장려금 체험 수기  ⬇️

     

    아래의 글들은 국세청에 있는 근로장려금으로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얻으신 분들의 실제 체험수기입니다. 

     

     

    여름날의 크리스마스 선물

     

    "서윤아, 힘든 일이나 고민 있으면 언니한테 언제든 말해. 그냥 시답잖은 수다거리도 괜찮으니까 자주 연락하고!" 서윤이는 더 이상 혼자 이겨낼 필요가 없다. 내가 항상 곁에서 함께 할 거니깐.

    외삼촌은 마흔 살이 넘어서 결혼했다. 2011년 겨울, 가족 식사 자리에서 외삼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며 한 사람을 소개했다. 얼굴은 작은데 눈 코 입은 오목조목 크고 뚜렷한, 마치 인형처럼 생긴 그 사람은 베트남 국적의 여성이었다. 그렇게 삼촌은 국제결혼을 했다.

     



    숙모는 한국말이 서툴고 낯가림을 많이 타서인지 말수가 없었다. 외할머니와 이모들, 많은 가족이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숙모는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 가는 듯 보였다. 몇 년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아기도 생겼다. 엄마를 닮아서일까? 아기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코입이 뚜렷했다. 모든 게 잘 풀려가는 듯 보였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삼촌네는 양육 과정에서 외할머니와 많은 다툼이 있었다. 삼촌이 회사를 간 낮에는 숙모와 외할머니, 둘 뿐이었는데 결혼할 때부터 숙모를 탐탁지 않아 했던 외할머니는 숙모를 자주 꾸짖곤 했다. 베트남의 양육 방식과 한국의 양육 방식은 매우 달랐고 한국말이 서투른 숙모는 외할머니와의 원활한 소통이 어려웠기에 서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셋 키워낸 외할머니는 외할머니의 방식을 고집했고, 숙모는 베트남의 양육 방식을 따르려 했다. 베트남은 신생아 때 귀걸이를 해주는 것이 베트남의 풍습이고 문화라고, 숙모는 태어난 지 3주가 된 아기의 귀를 뚫었다. 외할머니가 보시기에는 세균 감염과 염증, 무엇 하나라도 조심스러운 신생아에게 바늘을 갖다 대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사촌 언니·오빠가 쓰고 내가 쓴, 대대로 물려져 온 포대기로 외할머니가 아기를 감싸자, 숙모는 그렇게 오래된 헝겊을 왜 쓰냐며 내팽개쳤다. 삼촌과 이모들이 중재도 나서고 화해도 시켜보려 했지만, 그 순간만 괜찮아질 뿐, 상황은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서로의 문화를 받아들이지도, 존중하지도 않고, 원활한 대화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마음의 앙금은 깊어져만 갔고 언성은 계속해서 높아져 갔다. 그때부터 숙모는 아기를 데리고 자주 베트남 친정집으로 향했고 갔다가 몇 달을 안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기가 즉, 서윤이가 5살이 될 무렵까지 숙모는 베트남과 한국을 왕래하다가 서윤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시기가 되자 서윤이를 한국에 놔두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삼촌과 계속 연락은 하고 있지만 한국에 들어올 생각은 없다고 한다.

     



    겨우 7살밖에 안 된 서윤이가, 이 모든 걸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인 서윤이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온 가족이 걱정하고 고민하고 염려했지만 너무나 기특하게도 서윤이는 문제없이 씩씩하고 크고 있다. 엄마와도 연락을 자주 주고받고, 자기가 한 부모 가정이라는 것과, 다문화 가정이라는 것, 모든 것을 수용하고 보통의 또래 나이 아이들처럼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덧 언성을 높이던 외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도움 없이 혼자서는 거동도 불편하실 정도로 몸이 편찮아지셨고, 서윤이는 친구들과 학교가 마치면 화장품을 사러 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삼촌은 외할머니를 종일 돌보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고 수입이 없으니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삼촌 집에 갔을 때 서윤이랑 얘기하던 중 숙모 얘기가 나왔다. 서윤이는 베트남에 가고 싶다고, 돌아올 겨울에 아빠가 베트남에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서윤이가 숙모랑 연락한다는 것은 서윤이한테 직접 들은 말이 아니라 이모를 통해 들은 말이었기에 서윤이에게 직접 베트남과 숙모에 관련된 얘기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이 일을 이제 사촌 언니한테도 스스럼없이 말할 만큼 아이가 많이 단단해졌다는 사실이 기특하면서도, 이 아이가 이렇게 단단해질 때까지 얼마나 혼자 속앓이했을까 하며 안타까웠다. 누구보다 엄마라는 존재가 필요한 나이이고 그리울 텐데 혼자서 잘 이겨내고 있는 서윤이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때마침, 베트남은 여행 비수기인 우기에다가 방학이 끝나갈 때쯤이라서 왕복 비행깃값이 특가로 나오고 있었다. 기회라고 생각했다.

     



    올해 받은 근로장려금은 나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서윤이를 위해 쓰고 싶었고, 서윤이에게 선물하고 싶었고,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더 값지게 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외삼촌에게 학교 일정을 조율할 수 있냐고 여쭤본 후 허락을 받고 호찌민 편 비행기표를 끊었다. 외삼촌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서윤이가 더 이상 혼자 이겨냈지 않았으면 했기에 망설임과 고민 따윈 없었다. 예약 확정을 하기 위해서는 서윤이의 여권 정보가 필요했기에 뒤늦게 서윤이에게 사실을 전달했다. “사실 언니가 서윤이가 이번 여름에 베트남에 다녀왔으면 해서 선물을 준비했어.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 물어보자, 서윤이는 깜짝 놀라더니 “당연하지!”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9월 초, 서윤이는 베트남 호찌민으로 용감하게도 혼자 향했고 일주일간의 일정 후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이 사실을 말할 때 서윤이가 ‘갈 수 있어.’ 라는 말뿐, 이 외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에 엄마가 보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물어보고 예약할 걸 그랬나? 괜히 부담스러웠을까? 하고 걱정이 많았는데 베트남에 다녀온 후 서윤이의 바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너무 활짝 웃고 있는 서윤이 사진이라서, 비가 왔는지 우비를 입고 큰 나무 밑에서 너무나도 예쁘게 웃고 있어서 아니었구나, 가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네. 하고 안심이 되면서 뿌듯함이 몰려왔다.

     



    근로장려금 덕분에 나는 사랑하는 사촌 동생 서윤이에게 가장 필요했을 선물을 줄 수 있었고 준 선물의 몇 배로 큰 행복과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힘을 주고 함께 나누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지 또한 알게 되었다. 서윤이를 만나면 항상 말하는 게 있다. “서윤아, 힘든 일이나 고민 있으면 언니한테 언제든 말해. 그냥 시답잖은 수다거리도 괜찮으니까 자주 연락하고!” 서윤이는 더 이상 혼자 이겨낼 필요가 없다. 내가 항상 곁에서 함께 할 거니깐. 누구보다 엄마가 필요했던 서윤이에게 기회를 선물할 수 있게 해준, 마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던 근로장려금에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네 아이의 성장촉진제 근로·자녀장려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근로·자녀장려금이 딱 그런 셈이다. 곰이 입원하였다. 우리 집 2남 2녀 네 아이의 첫째를 밑에 세 동생은 평소‘곰’이라 불렀다. 커다란 체구와 어슬렁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곰 같다고 해서 동생들이 붙인 별명이다. 이렇게 곰 같은 체구의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발가락뼈가 부러진 것이다. 그래서 가까운 정형외과 병원에 입원하였다. 우리 가족은 병문안을 가서 침대에 누운 첫째를 보며 “여기가 동물병원이냐?” 라고 놀려대었다. 그게 벌써 8년 전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형과 8년 터울의 셋째 아이가 여름방학 중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발가락뼈가 부러졌다. 셋째인 남자아이도 지금 고교 2학년인데 다친 발가락 부위가 어쩌면 그리 형하고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다.
     


    우리 가족은 이번에도 “동물 병원에 가자”라며 병원으로 향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셋째 아이를‘고라니’로 불러왔기 때문이다. 조그만 아이가 어찌 그리 달리기를 잘하는지 겅중겅중 뛰는 모양새가 마치 고라니 같아서 그리 불렀다. 어렵게 살아 온 아이들은 눈치라는 게 있나 보다. 골절 치료를 경험해 본 첫째는 병원에 가자마자 셋째에게 “병원에서 조직 사진 촬영하자고 하면 안 찍어도 된다고 해. 엑스레이면 충분해”라고 말했다. 아이들도‘돈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빠인 나로서는 순간 서글픔과 대견함이 교차하였다.

     



    그래서 나는 “치료는 병원이 알아서 하는 거지”라며 의연한 아빠인 것처럼 이어서 말했다. “까짓것 놀지 못해서 마음이 병드는 것보다야 잘 놀다가 뼈가 부러지는 게 낫지. 괜찮아,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빠인 나로서도 ‘돈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부모에게 말도 안 하고 하룻밤을 참다가 발이 퉁퉁 부은 셋째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서야 아내로부터 아이의 발가락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순간 머리에 ‘찌릿~’ 하고 전기가 왔다. 아이가 다친 상황보다‘돈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이 가장으로서 당장에 닥친 현실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일터에서 일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환갑의 나이가 다 되어서 어디 돈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저런 걱정을 안고 퇴근을 하였는데 집에서 아내가 말했다. “여보, 장려금 신청한 것 잊으셨나요? 첫째 다쳤을 때도 장려금 나와서 병원비를 했었잖아요” 나는 금세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래, 맞아! 장려금을 신청했었지” 추석을 앞두고 근로·자녀장려금이 지급되었다. 예상보다 많이 나온 병원비에 조금은 부족하였지만 그래도 장려금 덕분에 갑작스러운 아이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취업을 한 첫째가 월급을 받았다며 병원비를 보태주었다.

     



    우리 가족은 매년 근로·자녀장려금의 수혜를 받아 왔다. 장려금이 처음 생겨난 2009년 다음 해인 2010년부터 지금까지 실직이나 고액 연봉 시기를 빼고는 매년 장려금을 받았다. 아이들 넷의 자녀장려금은 우리 살림에 규모 있는 보탬이 되었다.

    어느 해에는 근로·자녀장려금으로 아내의 가슴 종양 수술비를 감당할 수 있었다. 또한 차가 없어서 아이들 넷을 데리고 명절이면 강원도 시골집에 버스로 다녀오느라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불편했는데 장려금이 중고차 마련의 마중물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아이들 학원을 보내줘야 말아야 하나? 하면서 아내와 함께 잠을 못 자고‘가난의 시계추’처럼 수백 번 왔다 갔다 고민하던 문제를 장려금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장려금이 나오면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에 보일러 기름을 가득 넣어드리려 했었는데 계획대로 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당장 병원비에 보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첫째와 둘째 아이는 성장을 하여서 어느덧 자녀장려금 부양가족 요건을  넘어섰다. 아쉽지만 이제는 밑에 두 명에 대해서만 자녀장려금을 받을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아직 네 명의 아이가 모두 품 안에 있는 듯한데 벌써 이리 커버렸다니 장려금이 마치 성장촉진제 같기도 하다. 아니 성장 촉진 장려금인 셈이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다치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구세주처럼 도움을 주었던 장려금. 이제는 그 장려금의 수혜자인 첫째 아이가 취업을 해서 세금을 내는 사회인으로 성장을 하였으니 근로·자녀장려금이 ‘성장촉진제’라 할 만도 하다.



    그동안 2남 2녀 네 아이를 기르면서 정부나 지자체의 새로운 출산 관련 지원금 제도를 뉴스에서 볼 때마다 “나 때에는 없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고는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쉬움을 넘어 억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근로·자녀장려금으로 대신 보상받는 기분으로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장려금이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경제적으로 빠듯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장려금이 소중한 생활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네 아이를 기르다 보니 쌀은 또 왜 이리 빨리 떨어지는지….이러한 근로·자녀장려금이 나는 근로자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견과류 장사를 하는 옆집도 이번에 장려금을 받았다고 한다. 옆집은 장려금을 받고는 “마치 땅콩의 속껍질 같다”라며 좋아하였다. 견과류의 속껍질은 견과류가 익을 때까지 과육의 맛과 영양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마침 오래된 트럭 차량이 자꾸 고장을 일으켜서 속상할 때가 많았는데 이번 장려금으로 중고 트럭을 교체하는 데 보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옆집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삶의 활력소가 되는 근로·자녀장려금은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과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에게 지급된다는 점에서 일반 복지혜택에 비해서 생산적인 명분이 확실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사회적 과제가 일자리와 출산율로 알고 있다. 근로장려금은 고액의 연봉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맞는 다양한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응원군이 되어서 기업이나 취업 청년 모두에게 고용 및 취업 장려 효과를 준다. 또한 자녀장려금은 출산과 양육가정에서 아이를 위해 경제적으로 고민하던 문제를 적어도 한두 개쯤은 해결해 주는 산타 같은 선물이 되어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근로·자녀장려금이 딱 그런 셈이다. 국가가 견과류의 튼튼한 겉껍데기 역할이라면 장려금은 견과류가 익을 때까지 알맹이를 안전하고 옹골차게 지켜주는 속껍질 같은 성장 보호 기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