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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근로장려금 서면신청 서식은 아래에서 다운로드 받으시면 됩니다.

     

     

    1. 근로장려금 정기 신청 서류

     

    근로장려금ㆍ자녀장려금(정기, 기한 후) 신청서.hwp
    0.10MB

     

     

    2. 근로장려금 반기 신청 서류

     

    반기 근로장려금 신청서(개정 2023.3.20.).hwp
    0.10MB

     

     

    3. 근로장려금 개좌개설 서류

     

    근로장려금 및 자녀장려금용 계좌개설(변경철회)신고서.hwp
    0.04MB

     

     

    4. 국세청 보도자료

     

    240229-국세청 보도자료.pdf
    0.31MB

     

     

    ⬇️  함께보면 좋은 글  ⬇️

     

    오늘은 근로장려금 신청 서류 안내를 드렸습니다. 근로장려금에 관한 모든 내용이 이 블로그에 담겨 있으니 다른 글들도 살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  근로장려금 체험 수기  ⬇️

     

    아래의 글들은 국세청에 있는 근로장려금으로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얻으신 분들의 실제 체험수기입니다. 

     

     

    자기야 괜찮아! 아빠! 닭다리 먹고 힘내!

     

    “자기야! 괜찮아! 이제 친구 돈 다 갚았잖아. 내년에는 우리가 장려금 다 쓸 수 있어!”

    ‘헉! 헉! 헉!’ 먼저 가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아빠 빨리 와! 왜 이렇게 늦어”같이 등산하던 딸아이가 저에 발길을 재촉합니다. 지금 저와 딸은 저희 집 뒤에 있는 영도 봉래산을 오르는 중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정상을 바라보며 “아빠! 조금만 올라가면 다 왔어!” 집에서 출발해서 1시간 30분이면 넉넉히도 오를 수 있는 작은 산이지요!

     



    잠시 약수터에 떠온 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발걸음을 정상으로 움직였습니다. 작년 이맘쯤은 작은 비탈길도 무서워 저의 손을 의지하며 등산을 하던 녀석이 이제는 저보다 빠른 걸음으로 해맑게 웃으며 앞서가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정상에 도착하였습니다. 정상에 오른 뒤 정상 표지석의 옆에 서서 해맑게 웃으며 저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휴대폰에 오늘의 추억을 저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와 언니 동생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등산 모험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 가족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저와 아내 그리고 네 명의 딸(첫째 19, 둘째 16, 셋째 7, 넷째 3)과 함께 부산 영도의 신선이 거니는 뷰 좋은 동네에 살고 있는 다자녀 가족입니다!

     



    이렇게 네 명의 출생한 우리 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시작하겠습니다. 1년의 짧은 연애 기간을 지나고 결혼하고 나서 또 1년의 즐거운 신혼을 보내고 막상 둘의 신혼생활은 더 이상 이벤트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요즘같이 출산율이 저조한 이때에 조금 더 빨리 많은 복지혜택이 지원되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부모로서의 기초적인 지원과 함께 나라 최대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현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혼부부를 만나면 제가 알고 있는 출산 복지혜택을 나누며 출산을 적극 권장하며 다자녀의 장점을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와 아내의 자라온 환경이 이혼가정에서 자라 자녀 없이 둘만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하며 자녀의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사촌 누나의 조카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다시 마음을 바꾸어 아이를 가지려고 하자 아이가 생기지 않아 걱정하고 있던 차에 걱정하고 있던 6개월 뒤에 첫아이를 임신하고 10개월 뒤에 아내와 아기는 건강하게 순산하고 자녀가 주는 기쁨은 또 다른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 아이만 키워도 힘들어하는 주위 지인들을 보며 둘째는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그때 외동딸의 외로움을 잘 아는 아내는 둘째는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둘째를 3년 뒤에 출산하였습니다.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커졌지만, 차츰차츰 복지혜택은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셋째가 태어나고 넷째가 태어나자 부담감보다는 마음이 더 부자가 되는 것을 느끼며 더불어 자녀장려금은 2015년도부터 시행되어 나라에서 해마다 상여금을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2년 뒤 첫째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제 삶은 자꾸 힘들어져 갔습니다. 원인 모를 하지 마비로 자주 쓰러지며 20년 동안 마비 증상으로 원인을 찾기 위해 각종 여러 가지 검사를 해도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던 중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새벽부터 시작되는 심한 마비 증상으로 119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들어가 채혈 후 칼륨 부족으로 밝혀지고 난 뒤에 이런 증상이 있을 때마다 먹는 약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며 지금은 크게 아프지 않고 지내고 있지만 건강을 되찾고 보니 저에게는 많은 가족만큼 매달 들어가는 생활비와 대출금도 늘어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맞벌이를 하며 조금씩 대출금을 줄여가는 도중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 대상자라는 문자를 받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저는 화물차 운전을 하며 크지 않은 수입이지만 개인사업자라 이런 혜택이 나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 생각과 요즘은 보이스 피싱이니 휴대폰 악성 바이러스니 해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문자를 지우려다 일단 돈이 드는 건 아니니 국세청에 확인해보자는 아내의 조언과 함께 기대 반 의심 반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국세청 콜센터에 문의를 하였고 상담원에 상냥하고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에 대상이 되셔서 문자를 받게 되셨다는 말과 함께 신청하는 방법을 전달받고 간단한 등록으로 신청하고 난 뒤 예상 금액을 보고 너무 많은 금액에 ‘설마 그 금액이 입금될까?’ 하는 의구심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9월을 기다렸습니다.

     


     
    예상 금액을 보며 부품 마음으로 아이들과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여행을 할까? 아니면 월동 준비를 위해 가족 단체로 패딩을 살까? 하며 행복한 상상을 하며 기다렸지만, 그 끝은 너무 허무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친구에게 빌렸던 돈을 천천히 갚아도 된다던 친구가 급한 일이 있어 빌렸던 돈을 갚으라고 하여 우리 집으로 왔던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은 고스란히 나의 통장을 스쳐 지나 친구의 통장으로 입금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그 슬픈 소식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하고 너무 속상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에 모습을 본 아내는 “자기야! 괜찮아! 이제 친구 돈 다 갚았잖아. 내년에는 우리가 장려금 다 쓸 수 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셋째와 넷째가 휴지를 들고 와 눈물을 닦아주며 남은 돈으로 치킨 시켜 먹자며 말하자 우리 가족은 웃으며 치킨을 두 마리 주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치킨이 배달되자 치킨 상자를 보자 “와! 맛있겠다!” 하며 막내가 제일 먼저 닭 다리를 들고 와서 저에게 내밀며 “아빠! 닭 다리 먹고 힘내!” 하며 제 입에 물려주며 남은 한 손에 들고 있던 닭 다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가족 모두가 즐겁게 치킨파티를 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제 매년 희망찬 꿈을 꾸게 해주는 장려금 제도에 감사하며 많은 복지혜택 중에 간편하고 손쉽게 신청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다시 한번 살아가는 데 힘을 낼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장려금에 관련된 일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너무 감사합니다.

     

     

     

    호떡의 비기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무릎 꿇어가며 알고자 했던 호떡의 비기(祕器)가 나에겐 환급금으로 되돌아오는 목돈의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신용불량자가 되셨다.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을 한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1997년 11월은 유난히 더 추웠다. 모처럼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 밥상에 찬 이라고는 묵은 김치와 계란 후라이, 밀가루 맛만 나던 미니 돈가스 그리고 간장에 푹 절여진 시커먼 무짠지가 전부였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이 그저 반가웠다.

     



    말없이 눈인사를 나누고 수저를 들어 맨밥만 하염없이 입에 넣으시던 아버지는 동생들의 계란 후라이 쟁탈전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다 갑자기 고개를 떨구셨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밥을 입에 넣었어도 움푹 들어간 아버지 볼에 더 깊어진 보조개를 보고 있던 나는 그만 붉게 물들어 버린 아버지의 정수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쇠 밥그릇이 양은 밥상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길가 현관도 없는 얇은 유리문이 전부였던 우리 집 거실. 겨울의 찬 기운에 몸이 흔들린 탓인지 이가 부딪히도록 놀라버린 내 마음탓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때의 ‘쟁쟁쟁쟁…’ 소리는 선명하게 내 기억에 새겨져 있다.

     



    ‘글마 도망갔다. 이제 우리는 어째 사노… ’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실한 분이셨다. 다단계에 빠진 친구의 보증을 섰던 것이 사단이었다. 40년 지기 동네 불알친구였다. 연락이 끊어진 친구를 한 달이 넘게 찾아 헤맸는데 정작 쌀 한 가마니 집 앞에 두고 사라지는 친구의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고 하셨다.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고 그 집 사정도 빤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는 그날로부터 채무를 껴안으셨다.

     



    밥상을 그대로 방구석으로 밀어낸 어머니는 며칠을 누워 계셨다. 친구를 잡아 이 황망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 싸그리 사라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는 대충 씻은 쌀로 밥을 하고 계란을 반숙으로 구워 후라이를 한 뒤 간장 계란밥을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학교를 보냈다. 안성탕면에 사리곰탕까지 저녁은 대부분 라면이었다.

     


    나는 초록색 버스 차표 2장을 주머니에 넣고 등교를 했다. 급식이 없던 시기라 대부분은 굶었고 대부분은 집에서 밥이랑 김치를 싸가지고 다녔다. 친구와 도시락을 함께 먹을 때도 난 부끄럽지 않았다. 어머니의 김치는 특유의 시원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라 그 자체만으로 이미 훌륭한 찬이었다. 한 번씩 김치가 새서 가방에서 김치 냄새가 진동할 때 비로소 가난이 조금 불편하다고 느꼈다.
     


    며칠을 앓으시던 어머니는 머리를 둘렀던 흰 천을 풀어 접어 옷장에 넣으시곤 감색 앞치마를 허리에 동여매고 옆 마을 호떡집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비셨다. 제발 우리 마을에서 호떡 장사를 할 수 있게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하셨다. 당시만 해도 호떡의 비기祕器가 존재하던 시절이니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간절히 구하는 것뿐이었다.

     



    어머니가 짜주신 노란색 털옷을 입은 나는 무릎을 꿇어 애걸하는 엄마 옆에서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개를 숙여 신발에 바늘땀을 새어가며 슬픔도, 절망도, 괴로움을 마음속으로 한 땀 한 땀 꿰매었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난 어머니의 치열한 발걸음에 디디고 일어설 수 있는 반석이 되고 싶었다. 훗날 그날을 다르게 기억하는 우리였지만 버짐이 하얗게 피어오른 볼에 스치던 차가운 바람이 어느덧 따뜻해지기까지 우리 가족은 서로를 붙들었다.

     



    매서운 바람에 눈물 콧물 바람으로 엎드려 있던 우리를 일으켜 세운 그분께서 밀가루 봉지 뒷면에 꾹꾹 눌러써주신 반죽 만드는 법, 호떡 고명 판매 연락처 등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와 집 앞에 작은 호떡집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침 버스정류장이 집 앞에 있었기에 장사는 제법 잘 되었다. 밤마다 빨간 대야에 밀가루를 붓고 이스트를 부어 아버지는 호떡 반죽을 만드셨다. 아침이면 구멍이 송송 뚫린 반죽을 또 한 번 휘저어 젖은 천과 비닐로 수분이 증발하지 않게 싸두고 10킬로도 넘는 반죽 통을 작은 비닐 집 안에 옮겨두시고는 출근을 하셨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그 좁은 공간에서 하루 1만 원 때론 2만 원어치의 호떡을 파셨다. 운수가 좋은 날엔 5만 원이 넘도록 팔 때도 있으셨다. 어깨는 점점 오그라들고 손마디가 기름에 찌들어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지만 그렇게 두 분은 서로의 손을 매 만지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셨다. 14년을 그렇게 버티셨다.

     



    29살 결혼을 앞두고 현금 200만 원을 주시며 ‘미안하다’ 하시는 두 분의 손을 꼭 잡아드리고 잘 살겠다고 다짐하며 나섰다. 보증금 400만 원에 월세 8만 원 신혼집 단칸방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조금씩 나아지는 형편에 아이도 하나둘 생겨 어느덧 삼 남매를 키우며 성실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작년 지독한 코로나를 견딜 수 없었던 우리는 버티고 버티다 파산을 했다. 남편은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하게 되고 생활비로 쓴 카드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1997년 그때의 내 어머니와 같은 나이의 나는 세 아이를 가슴에 담고 워킹맘이 되었다.

     


    지난한 세월의 고단함이 자녀의 삶으로 끝없이 연체되는 것 같았다. 더욱이 나이가 들어 사그라들어 가는 부모의 삶까지 이자로 얹힌 것 같았다.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좌절감이 매일을 주저앉혔다. 억지로 웃었고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속이 뻐득뻐득하게 굳어가는 게 어떤 것인지 피부로 와닿던 시간이 무수히 흘러갔다. 신용불량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회생 절차를 밟고 일용직으로 하루를 버티는 남편을 그저 바라만 보던 난 집에서 아이만 키웠던 유약한 내 어머니와 하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무릎 꿇어가며 알고자 했던 호떡의 비기祕器가 나에겐 환급금으로 되돌아오는 목돈의 근로장려금, 자녀장려금이었다.

    추석이 다가올 즈음 나는 설렜다. 회생 절차를 밟아가며 같이 일을 하며 빚을 갚아가는 중에도 아이들은 자랐고, 시시때때로 필요한 것들이 생겼다. 제법 큰 돈이 들 때도 있었다. 미처 부모님께 알리지 못한 우리 형편에 때때로 몸이 사려졌다.

     


    하지만 이제 거의 다 끝나간다. 남편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덕분에 올 추석에는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울산 배가 들어있는 과일상자 근사하게 천으로 포장해 두 분께 용돈 봉투까지 만들어 드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감사하다.

    장바구니에 담아 뒀던 큰 딸아이 하얀색 메이커 신발도 하나 사고, 아들들이 노래 부르던 책들도 몇 권 사 줄 예정이다. 밑창이 다 닳아 비가 오면 새던 남편 작업화도 하나 사야겠다.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들을 봐주던 친구네 엄마에게는 영양제를 선물하고 아이들 이쁘다고 머리 한 두 번씩 그냥 깎아 주시던 미용실 이모님께는 떡을 한 되 해서 찾아 뵈어야겠다.

    그렇게 쓰일 돈이기에 든든하고 넉넉하다. 나는 온통 고마움이다. 비로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붉게 물든 정수리에서 본 절박함을 내 남편의 갈라진 양쪽 엄지손톱 끝에서 마주한 날이 있었다. 거칠게 말라버린 손끝을 나는 양손을 겹쳐 잡으며 말했다.

    “그동안 혼자서 고생 많았어. 함께 하자” 그때의 내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었던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못했던 그 말을 꾹 눌러 담아 오늘도 다독여본다.

    “고마워요”